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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陟 州 東 海 碑

 

 

瀛海漭瀁   百川朝宗   其大無窮   東北沙海   無潮無汐  號爲大澤   積水稽天   渤潏汪濊   海動有曀   明明暘谷 

太陽之門   羲伯司賓   析木之次   牝牛之宮   日本無東  鮫人之珍   涵海百産   汗汗漫漫   奇物譎詭   宛宛之祥  興德而章   蚌之胎珠   與月盛衰   旁氣昇霏   天吳九首  怪夔一股   颱回且雨   出日朝暾   轇軋炫煌   紫赤滄滄  三五月盈   水鏡圓靈   列宿韜光   搏桑砂華   黑齒麻羅   撮髻藵家   蜑蠻之蠔   爪蛙之猴   佛齊之牛   海外雜種   絶黨殊俗   同囿咸育   古聖遠德   百蠻重譯   無遠不服  皇哉凞哉   大治廣博   遺風邈哉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瀛海漭瀁 영해망양 큰 바다 가없이 일렁이고

百川朝宗 백천조종 온갖 냇물이 흘러드니

其大無窮 기대무궁 그 큼이 끝이 없어라

東北沙海 동북사해 동북은 모래바다

無潮無汐 무조무석 밀물 썰물 없으므로

號爲大澤 호위대택 대택이라 이름했네

積水稽天 적수계천 쌓인 물은 하늘에 다다르고

渤潏汪濊 발휼왕회 출렁댐이 넓고도 아득하니

海動有曀 해동유에 바다의 움직임엔 음산함이 서려 있네

明明暘谷 명명양곡 밝디 밝은 양곡은

太陽之門 태양지문 해뜨는 문이로다

羲伯司賓 희백사빈 희백이 공손히 해를 맞으니

析木之次 석목지차 석목의 위차요

牝牛之宮 빈우지궁 빈우의 궁으로

日本無東 일본무동 해 돋는 동쪽의 끝이로다

鮫人之珍 교인지진 교인의 보배와

涵海百産 함해백산 바다의 온갖 산물

汗汗漫漫 한한만만 많기도 하여라

奇物譎詭 기물휼궤 기이한 물건 조화를 부려

宛宛之祥 완완지상 너울대는 그 상서는

興德而章 흥덕이장 덕을 일으켜 나타남이로다

蚌之胎珠 방지태주 조개는 진주를 잉태하고

與月盛衰 여월성쇠 달과 함께 성하고 이지러지며

旁氣昇霏 방기승비 기운을 토하고 김을 올리고

天吳九首 천오구수 머리 아홉인 천오와

怪夔一股 괴기일고 외발 달린 기는

颱回且雨 태회차우 태풍을 일으키고 비를 뿌리네

出日朝暾 출일조돈 아침에 돋는 햇살

轇軋炫煌 교알현황 찬란하고 눈부시니

紫赤滄滄 자적창창 자주 빛 붉은 빛이 일렁거린다

三五月盈 삼오월영 삼오야 둥실 뜬 달

水鏡圓靈 수경원령 물은 거울이 되어 주위를 신령스레 되비추니

列宿韜光 열숙도광 늘어선 별들이 빛을 감추네

搏桑砂華 부상사화 부상의 사화와

黑齒麻羅 흑치마라 흑치의 마라와

撮髻藵家 촬계보가 상투 튼 보가며

蜑蠻之蠔 단만지호 단만의 굴과 조개

爪蛙之猴 조와지후 조와의 원숭이

佛齊之牛 불제지우 불제의 소들은

海外雜種 해외잡종 바다 밖 잡종으로

絶黨殊俗 절당수속 무리도 다르고 풍속도 다른데

同囿咸育 동유감육 한 곳에서 함께 자라네

古聖遠德 고성원덕 옛 성왕의 덕화가 멀리 미쳐서

百蠻重譯 백만중역 모든 오랑캐들에게 거듭 알려져서

無遠不服 무원불복 멀리까지 복종하지 않는 곳이 없었네

皇哉凞哉 황재희재 아아, 크고도 빛나도다

大治廣博 대치광박 큰 다스림은 널리 퍼져

遺風邈哉 유풍막재 남겨진 풍모는 끝이 없어라

 

 

<顯宗二年 先生來守是邦 撰篆東海碑 立於汀羅島 爲風浪澈沈 先生聞而 改書 今 參考兩本 大字用舊本 小字用新本 刻竪于竹串島  時 上之三五年乙丑春三月也>


현종 2년 선생이 이 곳에 태수로 와서 동해비를 짓고 써,정라도에 세웠으나 풍랑에 물 속으로 잠기니,선생이 이를 듣고 다시 써주었다. 이제 신,구의 두 가지를 참고하여,"척주동해비"라는 큰 글자는 구본<옛 비석의 탁본을 말하는 듯함>을 사용하고,작은 글자인 비문은 신본을 써서 각하여 죽관도에 세운다.  때는 숙종 35년 을축년 봄 3월이노라.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는

강원도 삼척시 정라동 육향산 산정에 있는 높이 175㎝,  넓이 76㎝, 두께 23㎝의 큰 비석으로서 조선 현종 때의 정치가이며 대학자인 미수(眉수) 허목(許穆 : 1595∼1682)선생이 세운 비석이다. 1660년(현종 원년)에 허목이 삼척 부사로 부임할 당시, 동해에는 조석간만에 의한 피해가 극심했다. 조수가 삼척 시내까지 올라와 여름철 홍수 때는 강하구가 막히고 오십천이 범람하여 주민들의 피해가 심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허목은 신비한 뜻이 담긴 동해송(東海頌)을 짓고 독창적인 전서체로 써서 1661년<을축> 3월 정라진(汀羅津) 앞의 만리도(萬里島)에 비를 세우니 바다가 조용해 지고,거친 풍랑도 이 신비로운 문장의 위력에 감동되어 그 후로 조수의 피해가 없어졌다고 한다. 

 

조수를 물리치는 신비한 비석이라 하여 일명 퇴조비(退潮碑)라고도 불리워졌는데, 원래의 비는 1707년, 풍랑에 파손되어, 1709년에 재차 건립한 것이 지금의 비이다.
 

 

 

 

허 목 의  생 애
 

허목 (1595∼1682 선조 28∼숙종 8)은 경기도 연천출신으로서   본관은 양천, 호는 미수(眉수), 자는 문보(文甫), ·화보(和甫),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아버지 현감 허교(許喬)와 어머니 임씨 사이에 1595년 12월 11일, 서울 창선방(彰善坊.  현재의 명륜동)에서 태어났다. 19세에 영의정 이원익의 증손녀와 혼인하였으며, 1615년(광해군7) 정언옹에게 글을 배웠으며 이익(李瀷)의 조부 이지안(李志安)과도 친교를 맺었다.

1617년(광해군9) 23세 때 거창 현감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가서 모계(茅溪) 문위(文緯: 1554-1631)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으며, 문위의 소개로 종형 허후(許厚)와 함께 영남 남인의 거두,정구(鄭逑: 1543-1620)를 찾아가 문하생이 되었다.
 

 


허목 영정
 
29세 때인 1624년(인조2) 광주(廣州) 우천(牛川)의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독서와 글씨에 정진하여 그의 독특한 필체인 고전팔분체(古篆八分體)를 완성하였다.

1626년(인조 4) 유생으로서 동학(東學)의 재임(齋任)을 맡고 있을 때, 생부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을 왕으로 추숭해 나가려는 인조의 뜻을 지지한 박지계(朴知誡)에게 그 이름을 유생 명부에서 지우는 벌을 가했다가 과거 응시를 금지 당하는 처벌을 받았다.

1657년 공조정랑 ·사복시주부를 거쳐, 1659년에 장령에 임명되자 상소를 올려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의 정책에 반대하는 등 중앙 정부에서의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1659년에 현종이 즉위한 후 경연에 참여하였으며 이듬해 다시 장령이 되었다.
 

이때 효종에 대한 인조 계비 조대비(趙大妃)의 복상 기간을 서인 송시열 등이 주도하여 1년으로 한 것은 잘못이므로 3년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예송(禮訟)논쟁을 시작하였다. 이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삼척부사로 축출되었으며, 그 곳에서 향약을 실시하고 읍지를 편찬하였다.
 

1674년 효종비가 죽었을 때 조대비의 복제를 송시열 등이 주장한 9개월복 대신 기년복으로 늘려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승리하고, 남인이 집권함에 따라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75년(숙종 1)에 산림직인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를 비롯하여 이조참판, ·우참찬, ·이조판서 등을 거치고 우의정에 임명됨으로써 과거를 거치지 않고 진출한, 산림(山林) 중에서 정승까지 승진한 흔하지 않은 인물이 되었다.
 

 


허목 묘소
 

이때 왕통을 문란하게 했다는 송시열의 죄를 엄하게 다스릴 것을 주장하여, 온건론자인 허적(許積)이 이끄는 탁남(濁南)에 대비되는 청남(淸南)의 영수가 되었다. 1676년에 사직하고, 특명으로 기로소에 들어간 후로는 허적의 전횡을 비판하는 격렬한 상소를 올렸을 뿐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실각할 때 관작을 삭탈당하고 학문과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향인 연천에서 학문에 전념하며 저술과 후진 양성에 온 힘을 기울였다. 죽은 후 1688년에 관작이 회복되고 마전(麻田) 미강서원(嵋江書院), 나주(羅州) 미천서원(眉川書院), 창원(昌原) 회원서원(檜原書院)에 제향되었다.

사상적으로 이황(李滉) ·정구의 학통을 이어받아 이익(李瀷)에게 연결시킴으로써, 기호 남인의 선구이며 남인 실학파의 기반이 되었다. 사서(四書)나 주희(朱熹)의 저술보다는 시 ·서 ·역 ·춘추 ·예의 오경(五經) 속에 담겨 있는 원시 유학의 세계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제자백가와 경서를 연구하여 예학(禮學)에 일가를 이루었다.

중국 진한(秦漢) 이전의 문물에 대한 탐구는 문자에도 적용되어 특히 전서(篆書)에 독보적 경지를 이루었다. 학(學)·문(文)·서(書)의 3고(三古)>라 불렸다. 저서로는 동사(東事), 방국왕조례(邦國王朝禮), 경설(經說), 경례유찬(經禮類纂), 미수기언(眉수記言)등이 있으며, 글씨로는 삼척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그림으로 묵죽도(墨竹圖) 등이 전한다.
 

 

 

 

비 의 내 력
  
허목은 1660년 10월부터 2년동안 삼척부사로 재직하면서 향약을 만들어 주민교화에 힘쓰고 척주지를 편찬하는 한편, 삼척이 동해에 가까워 조수가 들어 주민들의 피해가 심하자 '퇴조비'를 세웠다. 훌륭한 목민관(牧民官) 치적의 일환으로 척주동해비가 탄생된 것이다.

 

그는 당나라 한퇴지가 조주(潮州)에서 악어를 제축(祭逐) 한 고사를 따라 동해송(東海頌)을 짓고 비를 세우니, 과연 그  날부터 조수의 환이 없어졌다고 하는데,이 것이 이 비를 일명 퇴조비(退潮碑)라고도 부르는 연유이다.
 

글은 허목 자신이 지었으며 비제(碑題)와 본문을 모두 허목 독특한 고전(古篆)으로 썼다. 비제(碑題)인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와 본문은 판독이 쉽지 않은 과두문자이다. 본문은 그의 문집, 기타에 수록되어 있는 매우 유명한 문장으로서, 실상 200여 글자에 지나지 않는 짧은 문장이지만, 다음과 같은 일화와 함께 대단히 유명하다

 

<일화1> 허목은 다시 같은 문자의 비를 별도로 만들고 죽서루(竹西樓) 밑에 몰래 묻은 다음, 소리( 少吏)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은 뒤 때가 되면, 서인(西人) 수재(守宰)로, 나와 원수간에 있던 자가 와서 이 비를 파쇄할 것이오. 그렇게 된 즉, 조환( 潮患)이 여전하겠기에 네게 별도의 비석 뭍은 곳을 알려 주는 것이니 너는 명심코 누설치 말라"하였다 한다. 뒷날 이 말이 과연적중하여 다시 퇴조비를 세우게 되었는데 그 다시 세운 비가 곧 이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라는 것이다.

 

<일화2> 퇴조비를 세운지 49년이 지난 숙종36년(1710년), 새로 부임한 부사, 박래정(朴來貞)이 이 비석의 영험함을 전해듣고, 미신이라며 철거해 버렸다. 그후 다시 해일이 일어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자 박 부사가 근심에 쌓여있었다.
 

 


비의 후면
 

나이 많은 통인이 아뢰기를, 허미수 전 부사께서 오늘 같은 일이 있을 것을 미리 아시고 그 때 가장 나이 어린 저에게 당부를 하고 임지를 떠나셨습니다. "장차 퇴조비에 이상이 있거든 동헌 마루 밑에 퇴조비 하나를 묻어 두었으니 쓰도록 하라"   박부사가 동헌마루를 파보니 과연 퇴조비가 묻혀 있었다. 이에 잘못을 뉘우치고 퇴조비를 다시 세우고 나니 해일이 멎었다. 그 이후 사람들은 퇴조비를 수화불침(水火不侵)의 영물로 여기고 재앙을 막기 위해 소장하는 풍습이 유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비석의 내력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구전설화에 불과하며, 비석의 측면에 각한 추기(追記)에 따르면, 재차 비를 세우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다만, 대자(大字)로 된 구본과 소자(小字)로 된 신본에 관한 이야기만이 간단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 것으로 본다면 신비(新碑)를 새긴 연대는 1709년(肅宗 35)임이 분명하다.

아래의 문장이 측면에 해서로 쓰여진 추기인데, 이에 의하면 비석은 당초   정라도에 세웠으나(1661년), 풍랑으로 파손되어 바다 속에 잠겼으므로(1707년), 선생이 이 소식을 듣고 다시 써 주어, 비석 앞 면의 큰 글자는 구본(舊本,즉 원래 비의 탁본)으로 사용하고, 뒷면의 작은 글자는 신본(新本)을 사용하여,숙종 35년(1709년)에  재차 각하여, 죽관도에 세운(1710년) 것으로 풀이가 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허목은 1682년에 사망하였으므로, 1709년에 다시 비문을 써준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1708년 비석이 부서져 당시 부사 홍만기(洪萬紀)가 사방으로 비문을 찾다가, 문생(門生) 한숙(韓塾)의 처소에서 원문을 구하여 모사개각한 것을, 1709년 2월 부사 박내정(朴乃貞)이 죽관도(지금의 육향산) 동쪽에 비각을 짓고 옮겨 세웠다"는 김구용의 [척주지](1848) 내용이 옳을 것으로  본다.

 

따라서 "先生聞而 改書" 부분의 풀이가 명확치 못하다. 또한 미수 재임시 비의 파손으로 재차 건립하였었다는 설도 있으나, 학술적으로 좀더 전문성이 있어야 확인되겠는데, 여하튼 이 비는 이렇게 세월을 맞이해오다가, 세워져있는 위치가 음지인 관계로 훼손의 여지가 많아, 유지들의 건의에 따라 ,1969년 12월 6일, 현재의 위치인 육향산 산정으로 다시 이전 준공하였고, 지방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으니, 동일한 비가 두 번씩이나 제조되고, 장소는 3군데나 옮겨다니는 진기록을 가지게 되었다.

 

이 비문을 지니고 있으면 재액이 물러가며,가정에 안녕과 번창이 온다는  믿음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이를 간직하고 있으며, 현재 허목 후손의 댁에 소자(小字)로 씌여진 고본(稿本)이 전하고 있다.
 

 

 

조선 중기서예의 흐름과 허목의 전서
 

17세기 중국의 전서

일반적으로 전서의 입문은 금문(金文),대전(大篆)을 거쳐, 진(秦. BC221-205)의 허신(許愼)이 쓴 설문해자(說文解字)를 그 전범(典範)으로 하고, 당나라 이양빙(李陽氷)의 전법(篆法)을 거치는 것으로서 정통성을 확보하게 된다.  

 

허신과 이양빙의 연대 차이는 약 900년 정도가 되는데도 불구하고,도판에 보이는 바와 같이, 이양빙의 삼분기(三墳記)는 옥조전(玉조篆)이라는 전서로서, 운필(運筆)이나 결구(結構)에서 설문해자와 큰 차이가 없다. 이는 허신 이후 당(唐) 중기까지 전서의 변화가 많지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이양빙 이후 약 1,000년이 경과한 17세기경 청(淸)에서 주로 쓰여진 전서 역시, 이양빙의 전서와 비교하여 차이가 많지 않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전서는 서체가  실용성이  적어, 쓰임새가 많지않다보니 자연히 연구가 활발치 못하게 되므로서 빚어진 결과로 보아야 한다. 비액이나 인장등 극히 한정적인 용도에만 사용되어,폭넓은 변환을 이끌어내지 못하였던 것이다.
 


 

唐 李陽氷의 三墳記碑(762년)
 

이후 약 100년간 이러한 현상이 지속되다가 , 등석여(鄧石如 1739-1805)가 출현하여 일신된 전법(篆法)을 제시하면서, 이후 서령8가(西령8가)등 여러 전각가와 오창석(吳昌碩),등산목(鄧散木),제백석(齊白石)등 전서,전각의 대가들이 출현하여 중국 금속예술의 꽃을 피우지만, 그렇게되기 전, 17세기 초중반의 전서는 그 모양이 단아하고 정돈된 세련미를 특징으로 하는 것 이외에 별다른 예술성을 추가하지 못하므로서, 행서나 기타 서체의 발달에 비한다면 정체기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중기의 전서  

이렇듯,당 이후 송,명,청에 이르기까지 전서의 답보적 상태는 조선 중기 우리 서단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중국과의 교류에 의해서 행서 위주의 변화는 꾸준하였으나, 전서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이 워낙 부족하고,또한 좋은 교재를 입수하기가 어려웠던 때문에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못하였다.

 

금석학의 중국 의존도가 높았던 당시 조선으로서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조선말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 1953)이 전서와 전각에서 괄목할 만한 진전을 보이기 직전까지 계속되었으니, 조선에 전서 명가는 있었어도 명품은 없다시피한 것은 이러함에 기인한다.
 

조선 중기의 전서는 여말이나 선초의 전서와 크게 변화없이 소전(小篆) 중심으로 사용되었다. 당시에는 주로 행서와 초서가 쓰여지던 시대였다. 고려말 조맹부(趙孟부)의 영향을 받아 소위 송설체(松雪體)가 주류를 이루던 조선 초의 서풍은 다시금 왕희지(王羲之)풍으로 복고하면서 사자관(寫字官)   한호(韓濩 1543 - 1605 )의 서풍이 조선 전역에 큰 흐름을 가지고 있던 시절이었다.

 

전국을 풍미하는 행서 일변도의 서풍에 상대적으로 해서,예서는 그 중요도가 떨어지게되었으며, 그 중 전서는 현상이 더욱 심하여,  비액을 쓰거나 인장을 새기는 경우등을 제외하면 그 쓰여지는 예가 극히 드믈었다.
 

이렇게 빈곤한 환경 속에서도 꾸준히 전서가 명맥만은 유지하고 있었으니, 대표적인 서가로는 김상용(金尙容 1561- 1637), 김수환(金壽恒.1629-1689), 이정영(李正英,1616-1686), 김진홍(1621-  )등을 들 수 있다. 이중 김상용은 대전과 소전을 두루 갖추어 굵은 획으로 비액(碑額)을 많이 썼는데, 특히 평양에 있는 숭인전비(崇仁殿碑) 두액(頭額)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이정영 역시 엄정한 소전풍으로 전서를 썼으며, 미수의 고전(古篆)에 대하여 강하게 비판하고 나선 인물이다.

 

篆韻(전운)이란 전자운서(篆字韻書)를 지은 신여탁(申汝擢),삼전도비 전액을 쓴 여이징(呂爾徵),전문자관(篆文字官)으로서 전자편람(篆字便覽)을  펴낸 경유겸(景惟謙)등도 전서를 잘 썼다.

 

송계(松溪) 김진흥(金振興. 1621-   )은 전대학(篆大學)이란 학습서와 전자운서(篆字韻書)를 지어 고전(古篆)의 보급에 기여했는데,  그의 묵적으로 알려진 동명(東銘)은 소위 고전38팔체(古篆三十八體) 가운데에서 기자전(奇字篆)이라 불리우는 것으로서 특유의 도안적 형태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도안 형태의 전서는 비명(碑銘)에는 잘 쓰이지 아니하고, 그림이나 서책 또는 전각등에 사용되는데, 당시 제작된 계회도(契會圖) 의 제목글씨로 많이 쓰여져  조선 중기 전서의 한 부분을 장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허목은 하(夏),은(殷),주(周),삼대문자(三代文字)인 고전(古篆)을  집중 탐구하여 특유의 전서를 창안했는데 그 연구결과는 그가 평생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펴낸 고문운부(古文韻府) 9책,금석운부(金石韻府) 2책,고문운율(古文韻律) 4책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 영조때 학자이며 일세의 문장가인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는 자신의 시문에서 "지금 동해비를 보니 그 문사(文辭)의 크기가 대해(大海)와 같고 그 소리가 놀란 파도와 같아 만약 해령(海靈)이 있다면 그 글씨에 황홀해 질 것이나, 허목이 아니면 누가 다시 이 글과 글씨를 썼겠는가"라고 감탄했으며, 미수의 학덕과 인품을 흠모하던 정조(正祖)는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 이명기에게 명을 내려 허목의 초상화를 그리게 한 뒤, 대궐안에 비치하게 할 정도였다
 

반면, 당시 온건한 필법으로 서예계를 대표할 만했던 이정영(李正英) 같은 사람은 그의 광서괴행(狂書怪行)을 마땅치 않게 생각한 나머지 왕에게까지 그의 체를 금할 것을 청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집비(集碑)에서 배운 서체라 자칭, 여전히 이 법을 고수하였다 한다. 이정영의 이러한 간섭을 냉소하며 지었다는,"朝日上東嶺 煙霞生戶窓 不知窓外事 墨葛寫과두" 운운하는 풍자시는 이러한 서풍을 고집하는 그의 심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또한 이규상(李奎象)은 "미수의 획은 철획법(鐵劃法)으로 삼엄하기가 진한(秦漢)  이전의 획과 같았다." 고 말하고 있으나, 근대의 한문학자   임창순은 "중국에서 수입된 위조 하우전(夏禹篆)등 고전이 아닌 위전(僞篆)으로 익혔으나, 전서를 쓰는데 행서의 필의를 운용하고 행초에는 전법을 구사하는 등 새로운 형태를 창안하여 이채를 띄었다" 라고 말하고 있다.
 


 

 

허목의 행서 - 잡지(雜誌)
 
미수의 전서는 자형이 매우 복잡하며, 편봉을 과감히 사용했다. 반면 그의 행서에서는 오히려 전서 쓰듯 엄정하게 써내려간 모습을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행서보다는 전서가 더 엄중하게 느껴지게 마련인데도 불구하고, 미수의 경우 전서는 변화무쌍하고 가는 획인 반면, 행서,또는 행초의 경우 무게가 있고 장중하게 보이는 경우가 많다.

 

미수가 그의 전법을 완성함에 있어 고전에 근거하였다고는 하나,문자학적 측면에서 볼 때 정통성에 의아심이 가는 것은 사실이다. 즉, 설문해자 또는 이양빙의 전서를 입문치 아니하고, 금석운부(金石韻府)와 같이 조작된 글자가 많은 자본(字本), 또는 후인의 위작(僞作)이라 하는 하우(夏禹)의 비 등을 답습한 데에서 빚어지는 결과이다. 심지어 그의 전서를 잡전(雜篆)이라하여 정통서예에 비하여 하잘 것없는 자체(字體)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학습입문과정에서는 그러하나,그가 독창성과 개성을 두드러지게 하여 풍부한 예술성을 살리므로서 전서의 다양화에 기여하는 고전(古篆)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는 가치를 부여해야한다. 
 

또한 그는 중국,조선 양국이 공히 전서를 중히 여기지 아니하던 시대적 상황에서 고문을 깊이 연구하여, 전에 볼 수 없었던 특유의 서체를 개발하고,그의 문인들에게 물려주므로서, 조선사회 전서의 내재적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서예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간과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그의 전서작 중에서 척주동해비를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며, 이외에도 영상이원익비(領相李元翼碑), 구산사비음기(龜山祠碑陰記) 등 많은 금석을 남기고 있으나 , 단지 유감스러운 점은 그의 복잡 미묘한 필획에 대한 각을 정교히 할 수가 없었던 관계로, 금석문에서는 육필과 같은 생동미가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술한 대로 허미수의 전서는  문자학적 정통성 확보라는 면에서 찬반이 뒤섞인다. 하지만 고전(古篆)을 연구하여   이를 체계화하고 책을 펴내 보급하며, 더구나 전서 불모지나 다름없는 조선에 전서를 인식시키므로서 행서 일변도의 서예계를 다변화시겼다 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서예사적 공헌은 높이 평가 받아야 한다.

 

세인들로부터 괴기하다는 평을 들은 추사나 미수의 글씨.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자산으로 쌓여질 때, 비로서 우리 민족 특유의 대동서예(大同書藝)가 정착될 것이다. 단,민족적 긍지를 살리는데 급급하여, 결점에 대한 비판은 덮어둔 채, 장점만 과대평가하는 것은 학술적 자세로 볼 수 없으며, 결국 민족에게 해가 된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하겠다.